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둑/한국의 역사 (문단 편집) == 광복~1970년대 이전 == 광복 후 일본에서 프로 初단을 따고 귀국한 [[조남철]]의 주도로 1945년 [[한국기원]]의 전신인 '한성기원'이 설립되며 한국 현대바둑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. 조남철은 당시까지 면면이 이어지던 [[순장바둑]]의 폐지 및 일본식 바둑룰의 도입, 체계적인 승단 시스템 및 현대적 바둑 대회의 도입 등 면밀한 계획을 통해 현대 한국바둑의 토대를 닦았다. 그의 구상은 [[6.25 전쟁]]과 전후 혼란기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각고의 노력 끝에 실현된다. 한국전쟁기에는 잠시 부산에 피난가 있기도 했다가[* 이 때 조남철은 [[대한민국 국군]]에 징집되어 전투 중 부상을 입기도 했다.] 휴전 이후 서울로 돌아왔다. 1954년 사단법인 한국기원의 출범과 함께 제1회 승단대회를 개최, 1956년에는 최초의 본격적 프로기전인 [[국수전]]이 시작되어[* 초창기 대회명칭은 '국수1위전'이었다.] 프로체제가 완전히 본 궤도에 올랐다. 초기에는 조남철의 독주체제가 계속되다가 [[김인(바둑)|김인]], [[윤기현]] 등 일본 유학을 거친 신진 기사들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. 1970년대 초까지는 일본에서 바둑을 배운 이들 1세대 기사들이 바둑계를 지배했다. [[1968년]]에는 [[서울특별시]] [[종로구]] 관철동(삼일대로17길 16)에 5층 높이의 한국기원 건물을 준공하여, 여기저기 세들어 살던 신세를 청산했다. 이 건물은 준공 당시에는 주변 일대에서 보기 드문 고층 건물이었다고 한다. [[1994년]] [[성동구]]로 이전하기까지[* [[한국기원]] [[김우중]] 총재가 건물을 기증하면서 성동구 홍익동 사옥으로 이전.] 이 건물을 사용했고, 이 사이의 시기는 '관철동 시대'로 불리기도 한다. 이 건물은 당시 한국기원의 이사장이던 '''[[이후락]]'''[* 전 중앙정보부장. 정권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는데 바둑광이어서 힘을 썼다고.]이 힘을 써주어 건설될 수 있었는데, [[조남철]] 九단은 이 건물의 기공식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...아직 건물은 남아있으나 리모델링되어 모습이 많이 다르다. [[1967년]]부터는 한국기원의 기관지인 월간 <바둑>이 출간되기 시작했고, 현재까지도 나오고 있다. 여담으로 초창기 조남철의 바둑 내적 위상은 거의 절대적이었다. 그가 쓴 『위기개론』은 바둑공부의 바이블로 통했으며, 그가 八단으로 승단한 것이 1960년대 초반인데 당시 조남철을 제외하면 최고단이 四단이었다나. 이 때문에 한동안 그는 八단 승단을 거부하려고도 했다고.[* 이는 자신과 김인 정도를 제외하면 일본 프로기사들에게 정선 정도로 승부가 되는 기사조차 없었던 당시 한국바둑의 수준 차를 감안한 것이기도 했다고 한다.][* 조훈현 역시 한국기원에서 세계 최연소 입단 직후 일본으로 유학했는데 일본기원에서 그의 기력은 연구생 4급으로 깎이며, 일본의 프로기사들에게 몇 점 접어야 승부가 될 정도였다고.] 일반인들에게 ''''조남철이 와도 안 돼''''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. 후에는 시대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조남철이 조훈현, 이창호 등으로 바뀌긴 했지만... 어쨌건 조남철 이후 한국기원과 일본기원의 실력 차이는 약간 좁혀졌다. 결정적으로 일본 유학 출신의 프로 [[기사(바둑)|기사]]들이 [[병역법]] 때문에 한국으로 귀국하여 활약함으로써 일본기원과 한국기원의 실력 차이는 좀 더 좁혀지게 된다. 조남철은 애초에 일본기원에서 입단했다. 조남철 이후 한국바둑 1인자 계보를 이어간 [[기사(바둑)|기사]]로 김인, 윤기현, 조훈현 등. 이 3인 모두 한국기원에서 입단하고서, 즉 이미 프로[[기사(바둑)|기사]] 신분으로 일본으로 유학 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